본문 바로가기

그들의 박스

EP 02: 제가 말씀드린 대로

S#1  수리점 — 오전

강준이 부품 재고를 정리하고 있다. 문이 열린다. 서도현(34)이 들어선다. 노트북 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데스크탑 본체를 양손으로 안고 있다. 들어오자마자 가게 안을 한 바퀴 훑는다. 값을 매기는 눈이다.  

 

서도현

여기 수리 잘 하시는 거 맞죠?

 

강준 — 내면

첫 마디로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잘 고쳐주세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잘 하시는 거 맞죠?"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부탁이다.
후자는 검증이다.

 

강준

말씀하세요.

 

서도현

부팅이 되다가 중간에 멈춰요. 블루스크린은 아니고, 로딩 화면에서 그냥 멈추는 거예요. 저도 개발자라서 이것저것 다 확인해봤는데— 딱히 원인을 못 찾겠어서요.

 

강준이 본체를 건네받아 작업대 위에 올린다. 도현이 카운터 너머로 목을 빼며 따라붙는다.  

 

서도현

이벤트 로그는 다 뽑아봤고요. 드라이버 충돌도 아니고, 디스크 검사도 이상 없었어요. BIOS도 건드려봤는데— 솔직히 웬만한 건 혼자 다 해결하거든요. 회사에서도 팀 내 환경 세팅은 제가 다 맡고 있어서.

 

강준 — 내면

이 유형은 말이 많다.
그리고 말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자기가 충분히 했다는 걸 먼저 증명해야, 못 고친 것이 부끄럽지 않으니까.

강준은 이런 사람을 몇 번 만나봤다. 그래서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이미 알고 있다.

 

S#2  수리점 작업대 — 연속

강준이 케이스를 열고 내부를 들여다본다. 도현은 카운터에 팔꿈치를 올리고 멈추지 않는다.  

 

서도현

저번에 쓰던 컴퓨터는 직접 조립한 거거든요. 이건 회사 지급품이라 좀 달라서— 그래도 RAM 슬롯도 바꿔보고, 그래픽카드도 빼봤어요. 하나씩 테스트했는데 부팅은 다 됐거든요. 올라오다가 멈추는 거라서.

 

강준

RAM 다시 꽂으실 때 슬롯 위치 그대로 하셨어요?

 

서도현

원래 자리에 꽂았죠. 근데 사실 저는 커널 쪽 문제 같기도 했어요. 저 C랑 러스트 주로 하거든요. 시스템 프로그래밍 쪽이라 그런 게 먼저 눈에 들어와서— 뭔가 OS 레벨에서 타이밍 이슈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강준의 손이 메인보드 안쪽으로 향한다. 동전 크기의 배터리. 잠깐 손가락으로 눌러본다. 표정 변화 없이.  

 

강준 — 내면

찾았다.
생각보다 빨리.

바이오스 배터리가 거의 나가 있다. 시스템 시각이 계속 초기화되면서 부팅 과정의 보안 인증 루프가 걸리는 것이다. 배터리 하나 교체하면 끝난다.

그런데 지금 이걸 말하면 안 된다.

 

서도현

혹시 펌웨어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BIOS 버전 확인했을 때 업데이트가 좀 밀려 있긴 했거든요. 그것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강준 — 내면

이걸 더 들어서는 안 된다.

러스트가 어떻고, 커널이 어떻고, BIOS가 어떻고— 다 듣다가 고치고 나면, 이 사람은 나중에 이렇게 정리할 것이다.

"제가 말씀드린 것들이 결국 실마리가 됐네요."

그리고 배터리 하나 갈아끼운 나는 그 실마리를 주워서 조립한 사람이 된다. 당연히 수리비가 아깝다는 얼굴이 따라온다.

강준은 이 패턴의 끝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끊어야 한다. 그렇다고 돌려 보내서도 안 된다. 수리하는 걸 옆에서 보겠다고 할 게 뻔하다.

 

S#3  수리점 — 연속

강준이 공구를 내려놓고 허리를 편다. 서두르지 않는다.  

 

강준

좀 더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두 시간쯤 걸릴 수 있어요.

 

서도현

아, 저 그냥 옆에서 기다려도 되는데요. 같이 보면서—

 

강준

이 작업은 옆에서 보시면 더 오래 걸려요. 집중해서 봐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요.

 

도현이 잠깐 멈칫한다. 납득은 안 되지만 반박도 어렵다는 얼굴. 강준이 그 틈에 덧붙인다.  

 

강준

건너편에 카페 있거든요. 거기서 수리점에서 왔다고 하시면 30퍼센트 할인해줘요. 노트북 있으시잖아요. 거기서 작업하고 계시면 연락 드릴게요.

 

강준 — 내면

카페 할인은 사실이다. 건너편 사장이 먼저 제안한 거다. 손님이 기다리는 시간을 자기 가게로 데려오면 서로 좋다고.

오늘은 그 이유보다 다른 이유가 더 크지만,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다.

 

서도현

30퍼센트요? 오, 진짜요? 그럼 거기서 코드 짜면서 기다릴게요. 연락 주시면 바로 올게요.

 

도현이 노트북 가방을 추스르며 밖으로 나간다. 문이 닫힌다. 강준이 잠시 그 문을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S#4  수리점 작업대 — 잠시 후

혼자 남은 수리점. 강준이 바이오스 배터리를 꺼낸다. 동전 크기. 교체용 배터리를 끼운다. 전원을 연결하고 부팅을 시작한다. 로딩 화면이 올라온다. 멈추지 않는다. 바탕화면이 뜬다. 강준이 몇 가지를 더 확인하고 케이스를 닫는다. 작업 시간, 이십 분 남짓.

 

강준 (V.O.)
이 일의 값은 시간으로 매기는 게 아니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아는 것, 그게 전부다.
이십 분이 걸렸든 이틀이 걸렸든, 그 판단을 하기까지 들어간 것들은 같다.

 

S#5  수리점 — 오후

도현이 카페에서 돌아온다. 얼굴이 좀 풀려 있다. 강준이 본체를 카운터 위에 올려둔다.  

 

서도현

거기 아메리카노 진짜 맛있더라고요. 30퍼센트 하니까 완전 이득이었어요. 아, 그리고 알바생이 진짜 예뻤 — 아, 됐고. 다 됐어요?

 

강준

네. 부팅 확인해보세요.

도현이 전원을 켠다. 화면이 올라온다. 멈추지 않는다. 바탕화면이 뜬다. 도현이 모니터를 한동안 바라본다.  

 

서도현

오— 됐다. RAM 테스트할 때 제가 말씀드린 게 실마리가 됐나요? 그 슬롯 위치 얘기요.

 

강준 — 내면

왔다.
예상보다 빠르게.

 

강준

칠만 원입니다.

 

서도현

칠만 원이요? 음— 뭐가 문제였어요, 결국?

 

강준

부품 교체했고요. 점검 포함입니다.

 

도현이 잠깐 기다린다. 더 자세한 이야기, 어떤 부품인지, 어떻게 찾았는지. 강준은 영수증만 내민다. 도현이 카드를 꺼낸다. 잠시 머뭇거리다 긁는다.  

 

서도현

카페는 진짜 좋았어요. 할인도 그렇고, 분위기도 좋고— 아, 감사합니다.

 

도현이 본체를 챙겨 나간다. 문이 닫힌다. 창밖으로 그가 카페 방향을 한 번 돌아보며 걷는 게 보인다. 강준은 보지 않는다.

 

강준 (V.O.)
카페 감사하다는 말이 수리 감사하다는 말보다 먼저였다.
수리에 대한 말은 끝내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별 것 아닌 일을 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수리비도 군말 없이 제값을 받았다.

저 사람은 오늘을 아마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카페 할인 받고, 코드도 짜고, 컴퓨터도 고쳤다고.
그 순서대로.

 

강준이 다음 수리 건의 기록지를 집어든다. 오늘도 어김없이 적혀 있다—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원인을 모르겠음."

 

— EP. 02 끝 —